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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 종합

어찌 군 위안부 사건을 잊겠습니까 / 각시탈 20회 - 군 위안부 비화

 

어찌 군 위안부 사건을 잊겠습니까 /

각시탈 20회 - 군 위안부 비화

 

8월 15일! 오늘은 대한민국이 독립한지 67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비록 우리의 힘으로 독립하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신 애국지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대한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전쟁에 미쳤던 일본 우익들의 광기로 인해 희생되었던 대한제국의 수많은 사람들.. 일제의 갖은 억압과 핍박 속에서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일제의 가장 비열하면서도 야만적인 행위는 아마도 군 위안부에게 행했던 성고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각시탈 20회에서는 일제의 군관이 합동으로 군 위안부 여성들을 동원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일제 정부와 군은 자신들이 개입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경성의 직업소개소를 통해 군 위안부를 모집합니다. 일제는 높은 급여를 주는 군 간호부를 뽑는다는 달콤한 유혹으로 민간 여성들을 꾀어내는데요.. 가히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우등생 여 학도가 군 위안부로 자진하여 동원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일제가 어떻게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부들부들 떨리는 일입니다.

 

 

 

 

 

 

- 사진출처: KBS

 

 

 

 

 

 

실제로 일제 강점기의 군 위안부는 강제동원뿐만 아니라 모집을 통한 동원도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두산백과에서 발췌한 군 위안부 여성들의 실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발발)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늘어나는 주민 강간과 성병을 막고 군의 사기를 진작한다는 명목 하에 ‘군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군이 군 위안소를 만든 시기는 1932년경이며 본격적으로 설치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말부터이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목적, 관리감독, 위안부 동원에 대한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실행했다.

 

 

 

일본,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은 여성들이 은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총 숫자는 적게는 5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당시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가 동원되었으나 정확한 숫자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끌려간 여성들의 나이는 10대 초반부터 40대까지 광범위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식당종업원, 간호사, 여공 모집 등 취업사기에 속아 끌려갔으며, 유괴나 강제 연행 형식으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 일본군이 직접 나서거나 군의 협조 하에 민간인이 동원을 담당하였다.

 

 

 

끌려간 여성들은 열악한 군위안소에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위안소는 군부대 주둔지 근처에 별도의 건물로 들어서거나 군용 막사나 트럭이 이용되기도 했다.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위안부가 같이 생활하는 위안소는 변변한 위생시설조차 갖추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으며, 피해 여성들은 인권을 유린당한 채 소모품 취급을 받았다.

 

 

 

여성들은 하루에 평균 10명 내외에서 3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로 성행위를 강요당했다. 군인들은 요금을 지불했다고 하지만 지불한 요금은 위안부에게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으며, 아예 무료로 운영된 위안소도 있었다.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외출도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성병에 걸려 고생했다. 성병예방을 위해 삿쿠라고 불렀던 콘돔을 쓰게 되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는 군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군 위안부 여성들은 1~2주에 한 번씩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목으로 동원된 군 위안부 여성들은 일제시대의 가장 큰 희생양입니다. 위안부 여성들은 원치 않는 성관계와 갖은 성고문으로 인격을 말살당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민들을 전쟁물자 그 이상도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제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행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자로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우도 받지 못했던 군 위안부 여성들은 암울했던 과거를 대변하는 산 증인입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일본 군 위안부 기림비'는 가슴 아픈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을 포함한 9개 국가가 일본의 군 위안부 문제를 규탄하는 위안부 결의안에 동참한 가운데 일본 정부는 그 사실에 대해 부분적인 인정만 하고 있을 뿐, 그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나 보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 사진출처: 올포스트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쟁을 주도했던 일본 우익들의 법적 처벌과 그에 대한 보상,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 국왕(천황은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의미)의 진심어린 사죄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런던올림픽 축구 한일전 우승 직후 선보인 박종우 선수의 통쾌한 ‘독도는 우리 땅’ 세레모니는 그 연장선 상에 있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넋을 기리며, 살아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마음 편히 눈 감으실 수 있도록 일본 정부의 가시적인 행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